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마도 정벌 (문단 편집) ===== 계해약조 ===== 조선은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와 교역을 중단했다. 이에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어떻게든 조선과 다시 교역하기 위해 매년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왜구를 억누를 테니 교역해달라고 요청했다. 세종 8년(1426), 조선 정부는 이들의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간 그들이 앙심을 품고 또다시 왜구를 키울 것을 우려해 웅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등 3포를 개항하고 그곳에서 교역하는 걸 허용했다. 아울러 삼포와 서울에 왜관을 설치하고 그곳에 한해서만 왜인이 숙박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대마도주에게 입국 증명서를 만들어 줘서 입국하는 왜인은 이를 소지하도록 했고, 세견선은 1년에 50척으로 제한했고, 선원 수는 대선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정했다. 또한 3포에 머무르는 자는 20일까지만 그곳에 있을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해서 대마도와 조선의 무역이 재개되었고, 왜구는 백여 년간 조선 남해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 등이 발발해 양측의 갈등이 생기자, 조선은 [[중종(조선)|중종]] 대에 임신약조를 체결해 세견선을 절반으로 축소하고 삼포 거주를 불허했으며, 명종 대에 정미 약조를 맺어 세견선을 25척으로 줄였다. 이에 왜구는 조선에 반감을 품고는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조선은 이 일로 상당한 피해를 입자 [[비변사]]를 상설화하고 [[제승방략]]을 도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